가챠 시스템 2부: 각국의 가챠 규제 현황
가챠는 도박인가, 게임인가. 일본의 자율규제부터 벨기에의 전면 금지, 한국의 확률 공개 의무화까지. 각국이 가챠(루트박스)를 어떻게 규제하는지 정리했다.
가챠는 도박인가, 게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라마다 다르다. 어떤 나라는 전면 금지했고, 어떤 나라는 자율규제에 맡겼다. 어떤 나라는 확률 공개만 요구하고, 어떤 나라는 아직 제대로 된 규제조차 없다. 가챠(서양에서는 '루트박스')를 둘러싼 각국의 규제 현황을 정리했다.
일본: 자율규제의 나라
가챠의 발상지 일본은 의외로 정부 차원의 강력한 규제가 없다. 2012년 컴플리트 가챠 금지 이후 추가적인 법률 규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업계 자율규제 단체인 JOGA(일본 온라인게임협회)가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JOGA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가챠 확률 공개 권장 (의무는 아님)
• 천장 시스템 도입 권장
• 미성년자 과금 제한 권장
• 업계 자율 가이드라인 준수 권장
문제는 이 가이드라인이 '권장'일 뿐 강제력이 없다는 점이다. JOGA 회원사가 아니면 지킬 의무도 없다. 실제로 많은 게임이 확률을 공개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표기한다. 그래도 안칠라 사건 이후 업계 분위기가 바뀌어, 대부분의 메이저 게임은 자발적으로 확률을 공개하고 천장을 도입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가챠를 강하게 규제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 영향 때문이다. 모바일 게임은 일본의 주요 수출 산업이고, 가챠는 그 핵심 수익 모델이다. 규제를 강화하면 자국 산업에 타격이 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한국: 확률 공개 의무화
한국은 가챠 확률 공개를 법적으로 의무화한 몇 안 되는 나라다. 2024년 3월 22일부터 확률형 아이템 정보 공개가 제도적으로 의무화됐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사업자는 확률형 아이템의 종류·획득 확률·구성비를 공개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게임을 서비스하려면 다음을 준수해야 한다:
• 모든 확률형 아이템의 획득 확률 공개
• 확률 정보는 게임 내에서 쉽게 확인 가능해야 함
• 확률 변경 시 사전 고지 의무
• 미공개 시 과태료 부과
다만 한계도 있다. 확률 공개는 의무지만, 확률 자체를 규제하지는 않는다. 0.001%짜리 가챠도 확률만 공개하면 합법이다. 천장 시스템 도입 의무도 없다. 유저 보호보다는 정보 제공에 초점을 맞춘 규제라는 비판이 있다.
또한 '복합 확률' 표기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5성 확률 1%'라고 공개해도, 그 안에서 픽업 캐릭터가 나올 확률은 별도다. 이런 세부 확률까지 명확히 공개하지 않는 게임들이 있어 논란이 된다.
중국: 강력한 규제, 그러나...
중국은 표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가챠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2017년부터 시행된 규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가챠 확률 공개 의무
• 가챠 결과 공개 의무 (다른 유저가 뭘 뽑았는지 표시)
• 미성년자 과금 한도 제한 (월 400위안 = 약 7만원)
• 미성년자 게임 시간 제한 (주말/공휴일만 하루 1시간)
규제는 강력하지만, 업계는 우회로를 찾았다. 대표적인 것이 '번들 판매'다. 직접 가챠를 돌리는 대신, '100원짜리 아이템 + 뽑기권 1장' 세트를 판매한다. 형식상 아이템을 구매한 것이고, 뽑기권은 '보너스'인 셈이다. 이렇게 하면 확률형 아이템 규제를 피할 수 있다.
또한 미성년자 규제도 본인인증 우회 등으로 효과가 제한적이다. 그래도 중국의 규제는 글로벌 게임사들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서비스를 위해 별도 버전을 만들거나, 아예 글로벌 버전에도 확률 공개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벨기에·네덜란드: 전면 금지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가챠(루트박스)를 도박으로 규정하고 전면 금지했다. 2018년 벨기에 도박위원회는 FIFA 시리즈의 'FUT 팩', 오버워치의 '전리품 상자' 등을 조사한 후 "유료 루트박스는 도박법 위반"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결정으로 EA, 블리자드, 2K게임즈 등은 벨기에에서 유료 루트박스를 제거해야 했다. FIFA 시리즈는 벨기에에서 FIFA 포인트 판매를 중단했고, 오버워치는 벨기에 서버에서 전리품 상자 구매 기능을 비활성화했다.
네덜란드도 2018년 유사한 결정을 내렸다. 다만 네덜란드는 '아이템을 게임 밖에서 거래할 수 있는 경우'에만 도박으로 보는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 CS:GO 스킨처럼 외부 거래가 가능한 경우는 규제 대상이지만, 거래가 불가능한 가챠는 허용될 수 있다.
두 나라의 규제는 유럽 전체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아직 루트박스를 도박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EU 차원의 규제 논의는 계속되고 있어, 향후 변화 가능성이 있다.
미국·영국: 규제 논의 중
미국과 영국은 아직 루트박스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제가 없다. 하지만 논의는 활발하다.
미국에서는 2019년 조쉬 홀리 상원의원이 '미성년자 루트박스 금지법'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연방 차원의 규제는 없지만, 개별 주에서 규제 움직임이 있다. 또한 ESRB(미국 게임 등급 위원회)는 '인게임 구매 포함' 라벨을 도입해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20년 하원 디지털문화미디어스포츠위원회가 "루트박스는 도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도박위원회는 현행법상 루트박스를 도박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이템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2024년 영국 정부는 게임 업계에 자율규제 강화를 요구하며, 효과가 없으면 법적 규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업계 스스로 연령 확인, 지출 한도 설정, 확률 공개 등을 도입하지 않으면 규제가 올 수 있다는 경고다.
호주: 연구와 경고
호주는 루트박스를 직접 규제하지는 않지만, 정부 차원의 연구와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2018년 상원 조사에서 "루트박스는 심리적으로 도박과 유사하며, 특히 청소년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호주 정부는 게임 업계에 자율규제를 촉구했고, 일부 게임사는 호주 서비스에서 확률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금지나 도박 분류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규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2024년 9월부터는 루트박스가 포함된 게임의 최소 연령 등급을 15세 이상 '비권장'으로 상향했다.
플랫폼 정책: 사실상의 글로벌 규제
정부 규제와 별개로, 게임 플랫폼들이 자체적으로 확률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모바일이든 콘솔이든 PC든, 주요 플랫폼에 게임을 출시하려면 이 정책을 따라야 한다.
Apple App Store (2017년)
애플은 2017년 말 앱스토어 심사 지침을 개정해, 루트박스가 포함된 앱은 각 아이템의 획득 확률을 구매 전에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정책은 중국의 규제보다 앞서 도입됐고, 글로벌 모바일 게임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Google Play Store (2019년)
구글도 2019년 플레이스토어 정책을 개정해 확률 공개를 의무화했다. 애플과 마찬가지로 랜덤 아이템 구매 메커니즘이 있는 앱은 확률을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
PlayStation · Nintendo · Xbox (2019년)
2019년 8월, 소니·닌텐도·마이크로소프트 3사가 루트박스 확률 공개 정책에 합의했다. 콘솔 게임도 유료 루트박스가 있으면 확률을 공개해야 한다. EA, 반다이남코, 유비소프트 등 주요 퍼블리셔도 이 정책에 동참했다.
Steam
Valve의 Steam은 아직 확률 공개를 의무화하는 별도 정책이 없다. 다만 한국, 중국 등 법적 의무가 있는 국가에서는 해당 법을 따라야 한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규제하지 않는 나라에서도, iOS나 Android로 출시하려면 확률 공개가 필수다. 플랫폼 정책이 사실상의 글로벌 규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이 법적으로 확률 공개를 강제하지 않아도, 일본 앱스토어에 출시되는 게임들이 확률을 공개하는 이유다.
마치며: 규제의 미래
가챠(루트박스) 규제는 전 세계적으로 강화되는 추세다. 완전 금지(벨기에)부터 확률 공개 의무화(한국, 중국), 자율규제(일본, 미국)까지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방향은 같다. 더 투명하게, 더 책임감 있게.
게임사 입장에서 가챠는 포기하기 어려운 수익원이다. 하지만 규제가 강화될수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천장 도입, 확률 공개, 미성년자 보호 등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각 게임들은 어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을까. 3부에서는 원신, 명조, 니케, 블루아카이브 등 대표 게임들의 확률, 천장, 과금 효율을 비교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