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윤리 갈등, 실리콘밸리 전체가 정부에 맞서다
트럼프 대통령의 엔트로픽 연방 전면 사용 금지 이후, 경쟁사인 OpenAI와 구글 직원들까지 엔트로픽 편에 결집했다. 500명이 넘는 빅테크 직원들의 공개 청원, xAI의 유일한 순응, 그리고 2018년 이후 최대 규모의 테크 노동자 정치적 행동이 벌어지고 있다.
2026년 2월 27일, 트럼프 대통령이 엔트로픽의 연방 전면 사용 금지를 발표하자 실리콘밸리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경쟁사들이 엔트로픽 편에 결집한 것이다. OpenAI의 샘 알트만부터 구글 직원 수백 명까지, AI 기업들의 경쟁 구도를 넘어선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 사태는 단순한 기업 간 동맹이 아니다. 2018년 구글 Project Maven 이후 최대 규모의 테크 노동자 정치적 행동이며, AI 안전 가드레일이 '정치적 입장'으로 프레이밍되는 것에 대한 업계 전체의 반발이다. 실리콘밸리와 미국 정부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순간이 도래했다.
1. 경쟁사가 경쟁사를 지지하다: 알트만의 '동일한 레드라인' 선언
가장 주목할 만한 반응은 OpenAI에서 나왔다. 샘 알트만 CEO는 CNBC 인터뷰에서 "우리도 동일한 레드라인을 공유한다"고 명확히 밝혔다. 엔트로픽의 최대 경쟁사가 공개적으로 같은 편에 선 것이다. 알트만은 내부 메모를 통해 직원들에게도 이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발언의 무게는 맥락을 이해해야 느낄 수 있다. OpenAI는 2024년 1월 군사 사용 금지 정책을 조용히 삭제하고, ChatGPT를 국방부 플랫폼 GenAI.mil에 통합하며 정부와의 관계를 강화해 왔다. 그런 OpenAI가 '레드라인'이라는 단어를 다시 꺼낸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가 업계 전체가 수용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핵심은 엔트로픽을 돕기 위한 선의가 아니라, 자기 보호의 논리다. 오늘 엔트로픽이 무릎을 꿇으면, 내일은 OpenAI에게 같은 요구가 돌아온다. 실리콘밸리가 이를 정확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2. 구글 직원 반발: Project Maven의 기억이 되살아나다
구글에서는 더 격렬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100명 이상의 직원들이 AI 총괄 제프 딘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Gemini의 군사 사용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서한은 구글이 2025년 2월에 이미 삭제한 '무기 및 감시 금지 원칙'의 복원을 핵심 의제로 담고 있었다.
이 움직임은 2018년 Project Maven 사태의 데자뷔다. 당시 구글은 펜타곤의 드론 영상 분석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4,000명 이상의 직원 반발에 직면해 계약을 포기했다. 그 기억이 지금 다시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차이점은 규모와 맥락이다. 2018년에는 구글 단독의 사건이었지만, 2026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직원들까지 각 경영진에게 유사한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 AI 군사 사용에 대한 우려가 단일 기업을 넘어 산업 전체로 확산된 것이다.
3. 'We Will Not Be Divided': 500명의 실명 공개 청원
업계의 연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We Will Not Be Divided' 공개 청원이다. notdivided.org에 게시된 이 청원에는 구글 421명, OpenAI 76명 등 총 500명에 가까운 빅테크 직원들이 실명으로 서명했다.
청원의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펜타곤이 각 기업을 두려움으로 분열시키려 한다." 국방부가 기업 하나씩을 압박해 순응시키는 '분할 정복(divide and conquer)' 전략을 쓰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로 엔트로픽에 대한 연방 사용 금지는 다른 기업들에게 '너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경고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효과가 났다. 위협에 위축되기는커녕, 경쟁사 직원들까지 엔트로픽 편으로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2018년 Project Maven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테크 노동자 정치적 행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4. xAI, 유일한 순응자: '모든 합법적 용도' 수용
업계의 연대 속에서 유일한 예외가 있다. 일론 머스크의 xAI다. 2월 23일, xAI는 Grok 기밀 시스템 계약을 체결하며 '모든 합법적 용도(all lawful purposes)'에 동의했다. 펜타곤이 요구하는 조건을 전면 수용한 유일한 주요 AI 기업이다.
xAI의 순응은 머스크의 정치적 포지셔닝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지지자이자 정부효율부(DOGE) 수장인 머스크에게, 펜타곤과의 갈등은 있을 수 없는 선택지다. 이 구도는 AI 업계에 새로운 분열선을 만들고 있다. 정부 순응파(xAI)와 원칙 고수파(엔트로픽 + 연대) 사이의 간극이다.
에밀 마이클 전 우버 부사장은 다리오 아모데이를 "거짓말쟁이"이자 "신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이라고 공격하며, 펜타곤 편에 섰다. 그러나 이런 인신공격은 오히려 엔트로픽에 대한 동정론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5. 트럼프 AI 정책: 바이든과의 근본적 차이
현재의 갈등을 이해하려면 트럼프 행정부의 AI 정책 기조를 살펴봐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행정명령 14110을 통해 AI 안전과 규제를 강조했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이 행정명령을 폐기하고, 'Woke AI 방지' 행정명령을 발동하며 정반대 방향으로 전환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접근법은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주정부 수준의 AI 규제를 연방 차원에서 무력화한다. 둘째, AI 안전 가드레일을 '이념적 편향(woke AI)'으로 프레이밍한다. 셋째, 정부가 AI 모델에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프레이밍은 데이비드 색스 AI/크립토 정책 총괄이 주도하고 있다. 색스는 AI 안전 가드레일을 '좌파적 이념'이라고 규정하며, 가드레일 제거를 탈규제가 아닌 '이념 교정'으로 포장하고 있다. 다만 색스 자신이 AI 기업들에 투자한 이해충돌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이 프레이밍의 순수성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6. 의회와 시민사회: 초당파적 우려의 목소리
이 갈등은 실리콘밸리와 행정부 사이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의회와 시민사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4명의 초당파 상원의원이 헤그세스 국방장관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AI 군사 사용의 범위와 한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요구했다.
진보 성향의 브레넌 센터(Brennan Center)는 수정헌법 4조 관점에서 AI 감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주목할 것은 보수 성향의 카토 연구소(Cato Institute)까지 펜타곤의 접근법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AI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정파를 초월한 의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로포어 블로그 역시 "의회가 AI 군사 사용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는 논조의 분석을 내놓았다. 현재는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AI 군사 사용의 범위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 결정이 의회의 입법 없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민주적 정당성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7. 산업 영향: AI 안전이 '정치적 입장'이 된 세계
이번 사태가 남기는 가장 위험한 선례는, AI 안전 가드레일이 기술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입장'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엔트로픽을 "좌파 미치광이들(left-wing lunatics)"이라고 지칭했고,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빅테크의 이념적 변덕에 인질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프레이밍이 고착되면, AI 기업들의 안전 연구 자체가 정치적 리스크로 변질될 수 있다. 자율 무기에 대한 가드레일을 설정하는 행위가 '반정부적'으로 해석되고, 대규모 감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 '이념적'이라고 낙인찍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질적인 산업 영향도 크다. 정부 계약은 AI 기업들의 수익 구조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엔트로픽의 사례가 보여주듯, 정부 조건을 거부하면 연방 사용 금지라는 극단적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이 선례는 다른 AI 기업들이 안전 원칙을 유지할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약화시킨다.
마치며: 분열이 아닌 연대가 된 실리콘밸리
펜타곤은 엔트로픽을 고립시키려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위협은 공포가 아닌 결집을 낳았고, 경쟁사들이 경쟁을 넘어 원칙으로 연대하는 전례 없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500명의 실명 서명은 이 연대가 경영진의 전략적 판단만이 아니라, 일선 엔지니어들의 도덕적 확신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연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부 계약이라는 경제적 현실, 주주 압력, 그리고 중국과의 AI 경쟁이라는 안보 논리가 결합하면, 원칙은 빠르게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xAI의 순응은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AI 안전에 대한 결정이 더 이상 기술 기업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회의 입법, 시민사회의 감시,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AI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다.
- CNBC - Sam Altman says OpenAI shares Anthropic's 'red lines' on military AI
- The Verge - Google employees petition Jeff Dean over Gemini military use restrictions
- Reuters - We Will Not Be Divided: 500 tech workers sign open letter against Pentagon AI demands
- Wall Street Journal - xAI signs classified Pentagon contract as sole AI company to comply
- Lawfare - Congress Must Set the Rules for Military AI